- 라이브 드로잉은 현장에서 하나의 퍼포먼스나 쇼처럼 빠른 속도로 그리는 예술 장르예요. 어떤 계기로 라이브 드로잉을 하게 되었나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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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1년에 열린 부천국제만화전에 초대되었어요.
부스를 꾸밀 때 보통 삼면의 벽에 액자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, 지금 소속되어 있는 만화 기업 ‘수퍼 애니’의 대표님이 색다른 제안을 했어요.
벽 전체에 종이만 붙이고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자고. 재미있겠다 싶었죠. 관람객이 오면 사인도 해주고 대화도 나누면서 3일 간 그림을 그렸어요.
그 모습을 간단하게 영상으로 촬영한 후 장난 삼아 유튜브에 올렸는데, 조회수가 엄청나게 많았어요.
그 이후 해외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. 파급 효과가 그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했죠.
- 만화 작가로 그림을 시작하신 건가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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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.
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었을 때 우연히 '드래곤볼', '닥터 슬럼프' 등을 그렸던 일본 유명 만화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그림을 본 후
이렇게 예쁜 그림을 그리려면 만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. 그 때부터 한결 같이 만화가를 꿈꿨죠.
그림을 그릴 때마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이 이어졌고, 그런 칭찬에 고무되어 더 열심히 그렸던 것 같아요.
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이후 처음으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해 미대 서양화과에 진학했지만, 군대 제대 후 3학년 1학기 때 학교를 그만두고
본격적으로 만화판에 뛰어들었습니다. 그리고 27살에 '소년 챔프'라는 만화 잡지를 통해 첫 등단을 했어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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밑그림 없이 즉석에서,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려 완성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워요.
평소에 수없이 연습을 하시는 건가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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해외에서도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가장 많이 질문해요. 어릴 적부터 정말 많이 그렸어요.
아마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일 거예요. 초등학생 때도 하루에 3~4시간 정도는 그렸던 것 같고, 고등학교 시절엔 1교시부터 6교시까지,
수업은 제대로 듣지 않고 뒷자리에 앉아 계속 그린 적도 있어요. 그런 후 미술학원에 가서 4시간 동안 그리고, 밤에 집에 가서 또 다시
새벽 1~2시까지… 하루에 12시간도 넘게 그린 거죠. 지금보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공책의 외곽 여백부터 달력 종이 뒷면, 벽지까지 여백만 보이면
가리지 않고 그렸어요. 부모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죠(웃음). 또 어릴 적부터 시각적인 기억 능력과 관찰력이 좋은 편이었어요. 유치원생들은 보통
평면으로만 그리는 데 반해, 나는 그 때부터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곤 했어요. 한 면만 보는 게 아니라 후면, 반측면, 측면 등 사물의 여러 면을 인지한
거죠.
- 요즘은 프로젝트 외에, 평소에 어떤 그림들을 그리나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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늘상 소지하고 다니는 그림 노트가 있어요. 작은 스케치북에 가족과의 여행, 업무 미팅할 때의 모습, 광고 촬영 현장,
내가 좋아하는 바이크와 자동차 혹은 영화 등… 일상 속의 수많은 장면에서 받은 느낌과 그 때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기록해요.
그 자리에서 그리는 것도 있고, 집이나 호텔로 돌아온 후 눈으로 보고 느꼈던 이미지들을 그린 것도 있죠. 글이 아닌 그림으로 적는 일기인 셈이예요.
지금까지 그린 그림 노트의 수가 굉장히 많아요.
- 다른 라이브 드로잉 작가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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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재가 다양하다는 점이예요. 보통 작가 본인이 좋아하거나 주목하는 하나의 소재를 지속적으로, 여러 버전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거든요.
그에 반해 내 드로잉은 소재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. 아주 사소한 주변의 일상적인 사람과 사물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,
어떤 장소의 풍경들, 장면들에서 받은 느낌을 다양하고 자유롭게 표현해요. 행사장에서 그릴 땐 구경 온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요.
어떤 걸 그릴까요, 하고. 그게 무엇이든, 관객의 요청에 따라 즉석에서 바로 그려내요. 그동안 보고 느끼고 기억했던 내 머리 속의 자료와 지식들을
끄집어내는 거죠. 그리는 대상의 100퍼센트가 아닌, 특징적인 이미지를 캐치하고 기억해 60~70퍼센트 정도 구현한다고 할 수 있어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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밑그림 없이 즉석에서 펜 종류를 이용해 한 번의 필치로 그리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실수를 하거나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표현이 되는 경우도
있을 것 같아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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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무 많죠. 그래서 바둑 둘 때처럼 서너 수를 더 앞서 예측하면서 그려요. 이 부분을 그리면서 다음에 그릴 것을 미리 생각하는 거죠.
그런데도 실수를 할 때가 많아요. 계속 라이브 드로잉 작업을 하다 보니 실수를 적절히 보완해 내는 순발력이 점점 느는 것 같아요(웃음).
생각했던 대로 결과물이 나온 적은 별로 없어요. 그럴 때마다 머리 속이 과부하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, 정말 재미있어요. 짜릿함이 있죠.
- 이번엔 R8의 한쪽 표면에 라이브 드로잉으로 작업하셨어요. 아우디와의 첫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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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우디가 추구하는 미래 자동차에 대한 청사진을 이미지로 표현했어요. 아우디 코리아에서 아우디 고객과 팬들을 대상으로 미래에
자동차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죠. 자율주행 시스템으로 자동차가 지금보다 훨씬 스마트해지면,
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응답을 했더라고요. 지문으로 시동을 걸고, 손바닥만 살짝 대도 탑승자의 그 날
기분이나 바이오리듬을 체크해서 그에 맞는 음악을 선택해 주고, 차 안에서 책 읽기나 게임도 즐기고… 그런 이미지들을 표현했어요.
그 옆에는 아우디의 최신 기술들, 전기차인 e-트론, R8의 V10 엔진 등을 그렸고, 뒷바퀴 쪽에는 스키 슬로프에서 주행하는 모습으로 아우디 콰트로의
특별함을 표현한,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고를 구현했고요.
- 종이나 캔버스 같은 평면과는 달라서 조금은 낯설었을 것 같아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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곡면과 굴곡이 있어 처음엔 힘들었지만, 그리기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고요. 또 생각보다 면적도 넓어 10시간 정도 걸렸어요.
언제나 그랬듯이 처음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과 달라진 부분도 있어요(웃음).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.
- 앞으로 또 협업하고 싶은 장르가 있나요? 향후 계획은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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루브르 미술관과 협업하는 프로젝트와 내가 원하는 나라의 도시를 3주 간 여행한 후 그림으로 트래블 북을 만드는 루이비통과의 협업 계획도 있어요.
영화, 공연, 문학… 무엇이든, 어떤 장르든 내 느낌을 그림으로 자유롭게 구현하는 것에는 제한이 없어요.
실제로 파리 필하모니의 연주자들과 함께 클래식 공연 무대에서 연주와 동시에 그 느낌을 표현하는 라이브 드로잉을 한 적도 있고,
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자신의 소설을 만화로 그리는 컬래버레이션을 제안해서 스케줄 조율을 하고 있고요. 최근 봉준호 감독의 전작부터
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까지 구현하는 라이브 드로잉 쇼도 했어요. 프랑스, 일본 등에서 계속 전시 계획이 잡혀 있고,
국내에서도 곧 전시를 하고 싶어요.
글: 이정주/사진: 이정규